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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칸을 남겨두는 마음

최고야님 2026. 11. 8. 15:37

빈 칸을 남겨두는 마음

하루를 다 채우지 못했다고 그냥 하루를 비운 것은 아니다 

하루에 하루를 더한 달력
하루의 무언가 담기를 기다리는 달력. 사진=newsnlog

 

달력을 보면 빈칸부터 눈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적힌 날보다 아무 표시도 없는 날이 더 크게 보입니다. 약속도, 성과도, 특 별한 사건도 없었다는 이유로 그날을 허투루 보낸 것처럼 생각합니다. 분명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인가 했는데, 막상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짧아집니다.

그러나 달력에 적히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오래 미뤄둔 서랍을 정리하고, 답장을 쓰다가 지우고, 잘못 이해한 말을 다시 생각하는 일입니다.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했어도 한동안 붙잡고 고민한 문제입니다. 그런 것들은 대개 달력에 남지 않습니다. 하루를 차지한 시간과 하루를 설명할 수 있는 말 사이에는 생각보다 넓은 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평가할 때 완성된 것부터 셉니다. 몇 장을 썼는지, 몇 가지를 처리했는지, 무엇을 새로 얻었는지 묻습니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를 더하는 데 쓰지 않은 시간은 쉽게 손해로 분류됩니다. 고치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시간은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획표에 줄을 하나 긋는 일은 작은 만족을 줍니다. 그러나 줄을 긋지 못한 항목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그 앞에서 기울인 노력까지 없는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완성은 일을 설명하는 중요한 말이지만, 일의 전부를 설명하는 말은 아닙니다.

 

반가운 이정표
산 속에서 만나는 이정표는 반가움 더하는 고마움이다. 사진=newsnlog

모르는 길에서 만나는 이정표, 시간을 아껴주는 소중함 

길을 가다보면 방향을 알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고 시간을 허비하며 갈 때가 있습니다. 아는 길을 걸어갈 때보다 더 오래 걸릴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는 길처럼 보였는데 무심코 지나가다 보면 모르는 길에 와 있습니다. 그냥 가자니 불안하고 그대로 돌아 나오자니 더 멀어질까봐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이정표입니다. 모르는 길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만나면 반갑고 마음이 놓입니다. 길치를 위해 누군가 마련해준 배려에 조용히 감사의 마음을 전하게 됩니다.

요즘에야 네비게이션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 모르는 길도 마음 놓고 편하게 갑니다. 그 덕에 짧아진 시간에는 길을 찾아 망설이고 헤맬뻔 한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서랍에서 물건을 꺼내 버리는 시간도 비슷합니다. 정리가 끝난 뒤 보이는 것은 더 많은 물건이 아니라 조금 넓어진 공간입니다. 그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미리 남길 것과 놓을 것을 골라 정돈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산 속의 이정표
사람을 위한 이정표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배려를 전한다. 사진=newsnlog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운한 말을 곧바로 되돌려주지 않고 잠시 멈추는 일, 상대의 설명을 듣고 처음의 판단을 고치는 일에는 흔적이 잘 남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문장을 바꿨더라도 밖으로 나온 말은 고작 한마디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한마디가 관계를 덜 다치게 했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루의 일도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새로 만든 것이 없어도 잘못된 방향 하나를 멈췄다면, 불필요한 일 하나를 덜어냈다면, 그것 역시 하루를 사용한 결과입니다. 그만큼 불필요하게 버려질 시간을 잘 사용한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빈칸에 의미를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지치고 산만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도 있습니다. 그런 날까지 훌륭했다고 포장하면 마음이 더 피곤해집니다. 아쉬웠다면 아쉬운 대로 두면 됩니다. 다만 아쉬운 하루와 쓸모없는 하루를 같은 뜻으로 쓰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여백의 여유
혼잡한 도로에도 여백의 여유가 필요하다. 사진=newsnlog

내일의 자리를 오늘 모두 다 쓰지 않기

오늘 못 한 일을 적다 보면 내일의 목록이 길어집니다. 만회하고 싶은 마음에 하루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일을 밀어 넣습니다. 그러면 내일은 시작하기도 전에 빚을 진 날이 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제의 부족함부터 갚아야 하는 셈입니다.

밀린 일이 있다는 사실보다 버거운 것은, 밀렸다는 생각을 쉬지 않고 품는 일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잠깐 창밖을 보면서도 마음 한쪽에서 할 일의 목록이 넘어갑니다. 몸은 쉬는데 생각은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낸 휴식은 끝나고 나서도 쉬었다는 느낌이 적습니다.

여백을 남겨둡시다. 모든 일을 꽉 채운다면 만족감이 클 수 있지만 여유가 사라집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들어올 수도 있고,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무 일도 들어오지 않는다면 잠시 쉬는 자리로 두어도 좋습니다. 비워둔 시간이 반드시 더 나은 성과로 돌아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쉬는 시간에까지 결과를 요구하면 여백마저 또 하나의 일로 더하게 됩니다.

 

도로의 여유
도로의 여백은 안전운전의 여유가 생긴다. 사진=newsnlog

 

책상 위에 물건을 빈틈없이 올려놓으면 새로 펼칠 종이 한 장을 놓기 어렵습니다. 일정도 비슷합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겨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면 마음은 반가움보다 부담을 먼저 느낍니다. 여유는 남는 시간이 생긴 뒤에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미리 남겨두어야 지킬 수 있는 자리입니다.

하루를 마칠 때 모든 칸을 채웠는지 확인하는 대신, 오늘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끝내지 못한 일이 있어도 그 앞에서 보낸 시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만큼 생각했고, 잘못된 것을 조금 고쳤고, 지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그것도 오늘의 내용입니다.

불을 끄기 전, 내일 할 일을 적은 종이를 한 번 접어둡니다. 아직 남은 일은 내일 밝은 빛 아래에서 다시 보면 됩니다. 달력의 빈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아직 적어 놓지 못한 하루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