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여름이 물러난 자리에 어느새 가을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지나온 시간도 돌아보게 돼

아침저녁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문을 열면 후끈한 공기가 먼저 밀려들었는데 이제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들어옵니다. 한낮 햇볕에는 아직 여름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늘에 들어서면 계절이 이미 한 걸음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무도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온통 초록이던 잎 사이에 노란빛 하나가 끼어들고 어느 나무에는 붉은색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단풍이라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가을은 그렇게 소리 없이 자기 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왜 우리는 계절이 지나갈 때가 돼서야 그 계절이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게 될까요.
그렇게도 더웠던 여름도 지나고 나면 추억으로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습니다. 폭염경보라는 말이 일상이 됐고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흘렀습니다.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선선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침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니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벌써 오래전 일처럼 느껴집니다. 사람의 마음이 참 묘합니다.
봄에는 여름을 기다리고, 한여름에는 가을을 기다립니다. 겨울이 길어지면 다시 봄을 기다립니다. 늘 지금보다 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날 사진첩을 넘기다가 지나간 계절을 만납니다. 벚꽃 아래에서 찍었던 봄날 사진 한 장, 푸른 나무 아래를 걸었던 여름날 풍경 한 장을 보면서 그제야 생각합니다. ‘그때 참 좋았구나.’
당시에는 평범했던 하루가 시간이 지나면 그리운 날이 됩니다. 계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뒤늦은 자각
젊은 시절에는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내일도 있고 내년도 있고 다음 기회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도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쁘다는 이유로 미뤘고, 다음에 하자며 지나친 것도 많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시간에도 끝이 있었고 언제든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람도 어느 순간 만나기 어려워집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았던 장면들이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가족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던 일, 친구와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웃던 일, 퇴근길에 바라봤던 저녁노을 같은 것들입니다.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평범해서 기억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가을이 사람을 조금 감상적으로 만드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무가 한 해 동안 달고 있던 잎을 내려놓을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도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 인생에도 봄이 있었고 뜨거운 여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가을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나이가 됐습니다.
가을이라고 푸르지 않은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가을을 쓸쓸한 계절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무는 가을이 됐다고 갑자기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초록을 노랑과 빨강으로 바꾸며 오히려 한 해 중 가장 화려한 색을 보여줍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젊음의 속도는 조금 줄어들 수 있습니다. 예전처럼 밤을 새워 일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몸도 마음만큼 빠르게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져간 것만큼 남겨준 것도 있습니다. 경험이 생겼고 사람을 바라보는 눈도 조금은 깊어졌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굳이 붙잡지 않아도 되는지도 예전보다는 알게 됐습니다.
가을길을 걷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 이 계절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어느 날 오늘을 떠올리며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뒤에야 아름다웠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나간 뒤에 그리워할 오늘이라면 지금부터 아껴도 늦지 않습니다. 가을은 그렇게 지나가는 계절이 아니라 지금을 바라보라고 말해주는 계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생은 총천연색… 나무에게서 사람을 보다 (0) | 2026.10.03 |
|---|---|
| 산이 사라졌다… 도시와 산하를 가린 물안개는 마술사인가 (0) | 2026.10.02 |
| 또 하나의 가족 (0) | 2026.10.01 |
| [에세이스트 상념] 명절은 이제 사라져 가나 (0) | 2026.09.30 |
| [에세이스트 상념] 사람과 숫자 그 불가분의 관계 (0) | 2026.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