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긋불긋 물드는 공원길에서 만난 가을
계절은 흘러도 푸른 열정은 그대로 남아

휴일 아침 운동 삼아 공원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늘 걷던 길인데 이날은 나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초록 일색이던 잎 사이로 노란빛이 번지고 군데군데 붉은색도 섞였습니다. 어떤 나무는 제법 가을색이 짙어졌습니다.
가을입니다.
계절의 흐름을 유수(流水)에 비유하곤 합니다. 흐르는 물처럼 세월도 멈추지 않는다는 뜻일 겁니다. 폭염경보가 내리던 무더위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자연은 가을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습니다.
자연의 변화는 볼 때마다 경이롭습니다.
봄이 되면 새싹이 돋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집니다. 가을에는 노랗고 붉게 물들었다가 겨울을 앞두고 잎을 내려놓습니다. 누가 때를 알려주는 것도 아닌데 계절을 잊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자연과 계절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나 봅니다.

봄의 신록을 예찬하고 여름의 녹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가을이면 낙엽을 노래했고 겨울의 추위 속에서는 사람과 삶을 들여다봤습니다. 이양하의 ‘신록예찬(新綠禮讚)’과 이태준의 ‘신록(新綠)’·윤오영의 ‘하절(夏節)’·김진섭의 ‘낙엽송(落葉頌)’ 같은 글이 떠오릅니다.
자연을 바라보던 글은 어느새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민태원은 ‘청춘예찬(靑春禮讚)’에서 젊음을 노래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글에서는 노년의 삶과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공원의 나무 몇 그루를 보면서 너무 멀리 간 것일까요.
하지만 자연의 사계절을 사람의 일생에 비유하는 것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봄은 세상에 막 나온 유년기와 닮았고 녹음이 짙어지는 여름은 왕성하게 활동하는 청년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을은 살아온 시간이 깊어지는 장년기와 닮았고 모든 잎을 내려놓는 겨울나무에서는 자연스럽게 노년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한쪽에 서 있는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변 나무들은 노랗게 또는 붉게 물들기 시작했는데 소나무는 여전히 푸릅니다.
상록수(常綠樹)입니다.
사철 잎이 푸른 나무를 뜻하는 말이지만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상록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의지와 지조를 떠올렸고 심훈은 소설 제목을 ‘상록수’라 붙였습니다.
문득 사람도 상록수처럼 살 수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세월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청춘이 있었듯 누구에게나 노년은 찾아옵니다. 몸의 나이를 마음대로 붙잡아 둘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열정까지 나이를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평생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며 손끝의 기술을 다듬는 장인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붓을 놓지 않는 화가가 있고 글을 쓰는 작가가 있습니다. 연구를 계속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세월이 비켜간 것은 아닙니다. 얼굴에 주름이 늘고 몸은 예전 같지 않더라도 자신이 평생 해온 일을 향한 마음까지 시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상록수처럼 늘 푸른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늘 푸른 열정은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공원길을 걷습니다.
노랗게 물드는 나무가 있고 붉어지는 나무가 있습니다. 아직 초록을 간직한 나무도 있고 그 사이에서 소나무는 변함없이 푸릅니다.
어느 것이 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때가 되면 물들고 잎을 내려놓는 것도 자연이고 사철 푸름을 간직하는 것도 자연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청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만큼 깊어지는 나름의 색이 있습니다.
휴일 아침 운동 삼아 나선 짧은 산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무 몇 그루를 바라보다 춘하추동을 생각했고 청춘과 노년을 지나 장인과 열정까지 생각했습니다.
몸은 공원을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생각은 한 사람의 일생을 돌아왔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나무도 사람도 저마다의 색으로 익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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